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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46:1-10 ■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아야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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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렐루야로 시작한 시인의 찬양 노래는 할렐루야로 끝을 맺습니다. 자신의 삶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감사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1).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찬양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찬양하라는 시인의 말은 명령형입니다. 찬양이 택함을 받은 백성의 마땅한 의무이며 삶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 통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21). 찬송은 인생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2). 나의 생전나의 평생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활동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는 동안의 모든 시간과 움직임 속에서 찬송하겠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전제와 같이 부어지는 것입니다(딤후4:6). 순간순간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이제 찬송이 되는 삶,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삶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첫째,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3-4). 불완전한 것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인생은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때로는 상처와 배신으로 인해 고통 받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러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인생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품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시선과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감격과 감동은 가장 아름다운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모양도 없으신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가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탐욕을 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인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바른 길을 제시하고 인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귀인들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본받기를 원하고 가르침을 받기 원하고 때로는 한 번 만이라도 만나보기를 소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시인의 경고는 그들도 본질상 죄인이며 불완전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찬송이 되는 삶, 온전히 드려지는 삶은 헛된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시인이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라고 말한 것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 또한 강권적으로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5).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소망을 두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거짓 위에 삶을 세워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속이는 일만이 거짓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됩니다. 결국에는 썩어 없어질 모든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잠시 그 모양과 형질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진실함으로 지켜 가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진실함은 오직 참 진리가 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야곱은 거짓된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발꿈치를 붙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25:26), 그의 삶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잡으려고 헤매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족을 속이도, 꾀를 부리기도 하며 자신의 원하는 것을 잡으려는 인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결국 거짓되고 헛된 것을 좇는 인생이 될 뿐이라는 것을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빈 그물만 거둘 뿐 결국 아무것도 없는 빈 배로 돌아와야 했습니다(5:5). 마치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면서 허벅지 관절을 맞고도 그 붙잡은 것을 놓지 않았듯, 인생은 자신의 생각 자신이 가진 것들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32:28).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그 모든 것들이 한 때 배부름과 같은 만족감을 줄 수 있으나 버려지고 사라져버릴 배설물과 같음을 깨닫습니다(3:8).

셋째. 찬송이 되는 삶, 온전히 드려지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삶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먹을 것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며, 아프고 연약한 자를 고치시고 돌보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나그네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7-10). 그러나 악인에 대해서는 심판하셔서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7, 9).

하나님은 의로운 통치자이십니다. 시인의 하나님의 시선이 억눌린 자, 주린 자, 갇힌 자, 눈을 멀게 된 자, 비굴한 자,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증거합니다(7-9). 이들의 특징은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도 그러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내일이라는 한 날도 보장받을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절망하고 눌리기도 하며, 서로 빼앗고 빼앗기기도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인생은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선포합니다(10).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권능의 손길을 경험한 인생은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나는 참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시인은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이라 부르며, 그 분의 영원하신 통치 안에서 주를 찬송하며 살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19). 하나님을 찬송할 때 능력의 삶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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