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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79:1-13 ■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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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8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하나님은 죄악에 대하여 반드시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삯을 반드시 치르게 하는 것 입니다. 은혜는 죄악을 아무런 삯이 없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죄인을 더 큰 죄 가운데로 갈 수 있도록 방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삯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 그러나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의에 이를 수 없음을 아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죄인의 죄의 삯을 대신 지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입니다.

사람은 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악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스라엘은 바알숭배와 그 우상숭배에 따른 음행으로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 진노의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더럽혀지고 붕괴되었으며,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시인은 그러한 광경을 '돌무더기'와 같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1), 그 살육의 광경을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라고 탄식합니다(2-3).

또한, 그들의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는 이웃나라의 시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가슴아파하고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고 조소와 조롱 거리로 삼았다고 말합니다(4). 불행에 대하여 이웃이 함께 가슴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잘된 일이라하며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처참한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도 버려졌고, 이웃에게도 철저히 버려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성전은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음행에 젖어 있었으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예배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악함입니다. ,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였고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며 질투하시고 바벨론을 들어 징계의 도구로 삼아 예루살렘을 짓밟히게 하고 끌려가 칠십 년간을 노예로 생활하게 함으로 하나님 없는 삶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이 보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처참한 진노를 스스로 부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우리의 구원은 번복되지 않는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와 상관없는 자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이미' 천국백성으로 삼아 주셨지만, '아직' 천국백성에 합당한 훈련과 연단을 위해 '사탄의 미혹'을 허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결한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와 음행을 통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조롱거리로 삼았던 유다가 바벨론이라는 진노의 도구를 통해 철저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아삽의 기도는 죄악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먼저 아삽은 유다의 땅과 예루살렘 성전과 백성들이 '주의 기업'이라고 말합니다(1). 이는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에는 '내 것'이라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땅, 내 집, 내 종, 내 마음, 이러한 생각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땅과 삶을 잊어버리고 타락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며 교만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삽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인정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겸손하게 사는 자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을 '야곱'이라 하고, 백성들의 거처를 '그의 거처'라고 합니다(7). 야곱은 곧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주하듯 나와 얍복나루에서 머물며 그의 형 에서에게 건너가기를 미루며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다 허벅지관절을 맞고 승복하게 되는데, 이때에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지게 됩니다(32:13-32).

이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도적인 인도하심을 통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강을 건너 형 에서를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야곱을 꺾으시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셔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삽이 유다의 백성과 땅을 '야곱''그의 거처'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이 '약속의 말씀'의 본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끈질기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을 행하는 유다 백성들이 구원받을만한 어떤 근거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만이 유일하게 구원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 은혜의 본질입니다.

아삽은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라고 호소합니다(8). '조상들의 죄악'이라는 것은 과거 조상들의 죄를 한정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대로 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죄악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질적인 죄를 버리지 못하는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 약속에 근거하여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의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아삽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의 손을 거두면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삽은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11).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이미 갇힌 자의 탄식과 같은 삶이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의 도구로 삼으신 바벨론도 심판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바벨론은 진노의 도구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 유다 백성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성전을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라고 간구합니다(12). 이러한 아삽의 간구는 아무리 바벨론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다 백성들을 살육하는 잔인함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는 초라한 존재들에 불과하다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 유다를 징계할 권세도 바벨론을 심판할 권세도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구원요청은 첫째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둘째는 신앙적인 결단에 따른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임한 참혹한 진노의 결과 앞에서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합니다.

아삽은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합니다(9). 유다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든 나라에 선포하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아삽의 간구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라고 합니다(13).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서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양으로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말씀에 따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것을 결단한 자에게 언제든지 돌이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간구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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