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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49:1-9 ■ 찬양,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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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찬양,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시편 149편은 일명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불리는 146 - 150편까지의 시 중에서 4번째 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찬양할 것을 촉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나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시의 성격으로 보아 많은 신학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 온 유다 백성이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건축한 후, 영원한 영광과 승리를 기원하며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약속에 땅에 정착했다는 것은 속박되었던 곳에서 풀려나 참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49편은 구원받은 백성,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세상중의 어떤 이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아 하나님으로 인해 세워져가며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본질이 하나님께 속한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찬양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찬양하라"라는 명령적인 어조를 사용합니다.

시인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 찬양할지어다"라고 촉구합니다(1). 새 노래라는 최신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는 새 노래구원받은 자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새 노래라는 단어는 시편 외에 요한계시록 5장과 14장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새 노래란 구원받은 자들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노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십 사 장로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하는 향이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양이신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노래를 부릅니다. 장로들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노래합니다(5:9). 이는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그 피로 사셨다는 내용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처럼 성도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장로들의 노래를 새 노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9).

우리 삶의 본질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듯, 모든 모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은 하나님과의 '상호적인 관계성'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과의 상호적인 관계성이 없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호적인 관계성이란 곧 말씀을 통한 영적교제를 의미합니다. , 찬양이 없는 모임은 곧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적교제도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2). 시인이 이스라엘을 향해 즐거워하라고 촉구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무엇을 사주었을 때에 감사인사를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사줄 수 있는 부모님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감사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시온의 주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온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주민이라 부른 것은 사람 왕이 다스리는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앙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을 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일방적으로 배우고 습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말씀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내 일상 속에서 상호적인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상호적인 교제가 있는 사람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온 삶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춤추며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하라고 합니다(3).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표현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춤추는 장면이 두 곳에서 연출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노래할 때에 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추는 장면(15:20),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다윗이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에봇을 입은 채 춤을 주는 장면입니다(삼하6:14). 이처럼 소고와 수금으로 춤추며 찬양하라고 촉구한 것은 미리암과 여인들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다윗처럼 힘을 다해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인해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시인은 고백합니다(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는 이유가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물을 많이 드리거나 희생적인 헌신을 드리거나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기뻐하심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를 구원하심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4).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자가 아니라 늘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성도로서의 삶은 겸손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5).

찬양은 성도의 권리이자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됩니다. 성도의 무기는 입술의 찬양이며, 손에 있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두 날을 가진 칼입니다(6). 정의와 공평이라는 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곧 세상의 물질적 가치관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손에 말씀을 든 믿음의 용사로서의 모습으로 자신을 굳건히 세워가야 합니다(6). 또한, 삶이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라고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전달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문이나 인문학서적 등 다양한 책을 읽고 세상의 지식을 쌓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7).

시인은 마지막으로 뭇 나라는 심판을 받을 것이며 성도는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8-9). 찬양과 말씀은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통치하고 심판하는 권세가 될 것입니다(9). 지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삶을 사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이지만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결박과 영광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결박당하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며 그 영광은 성도된 자들이 누리게 하셨습니다(8). 우리는 이미 그 영광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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