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만일 그가 가난하여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죄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숫양 한 마리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22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23 여덟째 날에 그 결례를 위하여 그것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24 제사장은 속건제의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25 속건제의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26 제사장은 그 기름을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27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조금 찍어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28 그 손의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를 바른 곳에 바를 것이며
29 또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며
30 그는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한 마리를 드리되
31 곧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할지니
32 나병 환자로서 그 정결예식에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한 자의 규례가 그러하니라
■ 지정한 가치대로 드리는 속건제
나병환자들 중에서는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격리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정결예식을 치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진영 안에 들어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에서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 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가도록 하였으나(10), 경제적인 힘이 미치는 못하는 자들의 속건제를 위해 “어린 숫양 한 마리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만으로 대체하도록 함으로서 그 부담을 줄이도록 하였고(21), 속죄제의 제물로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22).
경제적 어려움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하여 정의를 굽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으며(출23:6), 그들에게 꾸어 준 돈의 이자를 채권자같이 받지 말 것이며(출22:25),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는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섬세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정결예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막지 못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소유의 정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차별이 될 수 없으며, 예물 액수의 차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리는 정도의 차이가 될 수 없습니다.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암양”으로 제사를 드린 자와,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둘이나 집 비둘기 새끼 둘”로 제사를 드리는 자의 정결의 정도가 다르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자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이 아버지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막11:17). 경제적 소유의 정도가 사람을 대하는 차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이미 교회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정결예식 또한, 다른 사람들의 정결예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어린 양의 기름 한 록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속건제의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정결케 된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그리고 남은 기름은 정결함을 받은 자의 머리에 바르도록 하였습니다(29).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에 대하여는 경제적인 정도에 따라 제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반드시 어린 양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속건제는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배상에 대한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속건제는 “지정한 가치대로”드리는 제사로서(5:18, 6:6), 부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단절되었던 나병환자가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위해 부정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속건제는 다른 제사들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이 드리는 것은 없고 개인적으로만 드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물의 종류가 오직 흠 없는 숫양으로만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에 있어서 다른 제사와 다르게 가난한 자에게도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토록 가난한 자에 대해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셨던 하나님께서 속건제물에 대하여는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외 없이 “흠 없는 숫양”으로 동일하게 드리도록 하신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정결의식을 드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위해 다른 제사와 같이 대체할 수 있는 더 작은 제물을 허용해 주시지 않은 것일까요?
여기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깊고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누군가 제물로 드릴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제공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속건제의 규례에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자들에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어린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제사제도를 보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쌍둥이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속죄제와 속건제가 항상 구분이 없는 것처럼 드려지는 것은 속죄제의 경우 죄를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의미이며, 속건제의 경우 그러한 죄로 인해 손해를 입은 피해자에 대해 보상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에는 반드시 피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속건제의 규례는 오늘날 죄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부분도 반드시 해결하고 관계회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속건제의 어린 양의 기름을 조금 찍어 정결함을 입은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피를 발랐던 곳에 바르도록 하였고, 그 남은 것은 그의 머리에 바르도록 하였습니다(28-29). 이는 그가 이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으로 완전히 정결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속건제의 제물인 숫양의 피와 기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를 씻음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속건제는 숫양을 드리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피해를 끼친 것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해야 했습니다(6:5).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손해액뿐 아니라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갚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그러한 손해에 대한 배상을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레위기의 제사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속제물을 통해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가난한 자들과 같이 자기의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마리의 흠 없는 숫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을 대신 보내주심으로, 갚을 길 없는 가난한 자의 죄를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으심으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고통은 어쩌면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오분의 일을 더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처럼 레위기의 속건제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과 별도로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하게 한 것을 두고, 배상이 곧 속죄가 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하는 것은 곧 진정한 회개에는 “진실한 회개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더 이상 속건제가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 정신만큼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선언합니다(눅19:8). 이러한 레위기의 속건제는 오늘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물질에 눈이 멀어 피해자들에게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세상의 세태를 본받지 말고, 자신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책임지려는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의 속함을 받은 성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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