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 새 소망의 미래가 되시는 하나님
유대인의 속담에 “가장 큰 고통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못함’에는 여러 가지 속사정이 담겨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해 줄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이러한 일을 당할 때 고통스러우면서도 억울하기도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것 같아 주변사람들에게 말도 하지 못한 일이 있기도 합니다. 시편 26편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시의 내용은 시인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말합니다(1). 다윗이 말한 ‘완전함’이란 “흠이나 죄가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함에 행했다”는 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했다”는 의미로. 스스로 죄가 없거나 완벽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여호와여 판단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신을 신원하여 줄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신원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공정하게 재판하다”는 의미로, 재판을 통해 진실의 여부를 가려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에 대해 여호와의 궤를 옮길 때 일어난 웃사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삼하 6장),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라고 하기도 하며(삼하 15장),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불량배 세바의 반역이 있었을 때라고 하기도 합니다(삼하 20장). 어떤 상황이든지 이러한 모든 사건의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고난 앞에 다윗은 “내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라는 고백에서 더욱 또렷하게 나타납니다(8).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걸어온 삶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으로 것으로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22:21).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행함을 판단해 달라고 간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예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진실 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다윗의 부르짖음은 더욱더 거침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시험하고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2).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나의 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가진 믿음의 확신은 단지 하나님 앞에서의 성찰로만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려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자신을 삶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4-9). 외식을 하거나 헛된 것을 좇아가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우상을 숭배하거나 뇌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살인자와 같은 악인들의 주변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9). 오직 자신이 머물고 싶은 곳은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임재하신 성전이라고 말합니다(8). 자신이 걸어왔던 여정의 희망 도착점이 바로 자기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정의 마지막 도착지에서 성결한 자로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감사의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6-7). 그러한 희망 도착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올바르지 않는 길은 결국 희망하는 목적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을 향해 살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니 자신의 생명이 억울한 일로 인해 소멸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9). 이러한 다윗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삶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대한 목적의식도 분명해야 하지만 삶의 여정도 성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세상의 성공과 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삶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일 뿐,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합니다(10-11). 시인에게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며 ‘사악함’이란 자기의 탐욕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사악함의 모습은 삶 속에서 악행과 음행으로 나타납니다. 잠언서에는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4:14). 이때 ‘사악한’이라는 히브리어는 ‘라샤’는 “위반하다”, 혹은 “악행을 일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라샤’라는 단어는 매춘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것을 언급할 때에 쓰였으며,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탐욕에 끌려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뇌물’은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한 미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실족하지 않았던 다윗은 이제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을 믿음으로 섰음을 선포합니다. 다윗은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가운데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선포합니다(12). 이제 그 견고한 믿음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전념할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만이 새 소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삶에 평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가졌던 다윗의 삶도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변함없는 믿음의 길이 결국 시온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게 할 것입니다.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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