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 하나님만이 빛이요 구원이시라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곧 개인이 가진 가치관으로서 삶의 큰 그림을 그리는 시작점이 됩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보며 서로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상황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식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은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겐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별을 찾는 매개이지만, 생수를 파는 사람에게는 사업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목마른 사람에게는 그저 갈증을 해소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제시합니다. 실용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실존주의 등이 바로 그러한 눈을 제시한 것들로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세계관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의문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이러한 질문에 “인간은 자연의 우연한 산물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진화론은 인간을 우연한 자연의 산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 불완전한 지식입니다. 우연을 진리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질문에 대해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며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다”고 답하고 있습니다(창1:27-28, 2:15).
다윗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다”라는 것이 다윗의 세계관입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다윗에게 고난과 고통은 존재하지만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합니다(1). 하나님만이 악한 세력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빛’이 되시며 ‘구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나의 하나님’이 되셨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주의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을 통해 높으신 뜻을 세워가고 계십니다.
나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며 묵묵히 순종하는 삶이 승리합니다. 환란과 어려움은 결국 견고한 삶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며 두려움은 승리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2-3). 그는 낙심하지 않고 의심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자신의 살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악인들 앞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대적들의 군대 앞에서 두려움 없이 태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2-3). 태연하다의 시제는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지켜주셨던 것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험한 풍파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다윗,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다윗이었지만 그의 단 한 가지 소원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가 아닌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4). 평생에 소원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부귀와 영화보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고 최고의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참다운 기쁨을 얻고, 승리를 위한 지혜로운 말씀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삶의 최고 가치를 하나님께 두게 했습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이란, 숫자적인 의미의 한 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이란 ‘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호와께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환란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5).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초막 속에 숨겨 지켜 주시고, 장막에 숨겨 두셨다가 반석 위에 세워 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과거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어떠하심에 대해 경험하였던 시간이 미래에 대한 확신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평탄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11). 그것은 다윗이 실패하지 않을 확실한 길이며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12). 그러므로 다윗에게 가장 큰 형벌은 “하나님의 버려둠”입니다(7-10). 하나님 없는 삶이 곧 실패요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며 떼를 쓰듯이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7-9).
다윗에게 하나님께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부모가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며(10),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외면하지 않으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13). 그의 확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화와를 기다릴지어다”라고 외칩니다(14). 그 외침은 독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주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전해도 좋은 확실한 진리이며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그의 호소의 초점은 ‘기다릴지어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초점은 ‘여호와’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모래 위의 성과 같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면 헛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구원하여 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는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1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것도 헛된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일뿐 아니라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겐 두려움도 절망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하나님의 때를 바라는 기다림만 있을 뿐입니다.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시편 묵상(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29:1-11 ■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 (0) | 2024.05.08 |
---|---|
시편 28:1-9 ■ 무덤과 같은 곳에서도 (0) | 2024.05.07 |
시편 26:1-12 ■ 새 소망의 미래가 되시는 하나님 (2) | 2024.04.28 |
시편 25:1-22 ■ 여호와의 길은 인자와 진리이니 (2) | 2024.04.27 |
시편 24:1-10 ■ 만왕의 왕이시는 하나님 (2) | 2024.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