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불공평한 것인가?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시인은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2-3).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삽으로서 그는 레위 지파의 게르솜의 자손이 베레가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한 사람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였습니다(대상16:4-6).
시편에서는 그의 많은 찬양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시편 53편을 비롯한 73편에서 83편까지의 총 12편이 그의 시입니다. 특히, 성경은 아삽이 찬양 사역뿐만 아니라 다윗 왕의 측근에서 선견자의 역할도 감당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35:15).
이처럼 다윗의 최 측근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을 사역을 맡은 아삽으로서는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넘어뜨리려는 많은 악의 세력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며(1), 악인들에 대하여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19).
시인이 말한 ‘정결한 자’란 원어적으로는 ‘분리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음에서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으로서 살고자 하는 자, 즉 신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함을 받아 의롭다 칭함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를 말합니다.
왕의 측근에 있다는 것은 많은 불의한 자와 불법한 자들로부터 달콤한 제안을 받거나 혹은 미혹이나 심지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선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으로 왕을 보좌하고 자신의 직무에 성실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왕의 측근에 있다는 것은 곧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런 그가 많은 유혹과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무를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었고, 왕의 선견자라 칭함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레위족속이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다윗 왕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 분의 뜻을 묻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수 없이 보았을 것이며, 그러한 다윗 왕을 하나님께서 친히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삽의 시는 궁중에서의 안락하고 편안함 속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악인의 형통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시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이 더 형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 형통하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에게도 때로는 큰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아삽은 그러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자신 또한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2). 넘어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는 것은 반복적인 강조로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큰 시험’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이 강건하고 죽을 때도 고통이 없으며, 일반적인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조차 그들은 겪지 않으며(4-5), 항상 편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납니다(12). 아삽은 그러한 악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탄식합니다(13). 즉,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모두 헛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는 악인의 형통함이 전부가 아니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세상 가운데 두신 목적은 악인들과 같이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누리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악인들은 이 세상 자체가 목적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영혼들에게 있으므로, 악인들이 세상에서 형통한 것은 한낱 허상일 뿐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큰 시험에 들어, 결국 그들의 가치관을 좇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참 뜻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큰 시험에 드는 이유가 ‘질투’ 때문이라고 증언 합니다. 실제로 자신도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강건함을 자랑하는 악인의 오만함을 질투하였다고 고백합니다(3).
결국 이러한 아삽의 고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것은 ‘악인의 형통함’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의 질투’, 즉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많은 사람들은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면서 그에게 무언가 얻기를 바라고 주변에 몰려들며 그의 잔에 가득한 물을 마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 가고 있다고 증거합니다(10-11).
또한, 아삽은 많은 것을 갖고 누리고 있는 악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며, 악인들이 자신들의 입을 하늘에 두고 혀는 땅에 두루 다닌다고 고발합니다(9). 이는 곧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참 진리를 말한 자처럼 거만하고 자신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행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의 삶은 고달프기만 합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아삽은 그러한 삶을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14).
이는 시인이 신앙에 대한 심각한 회의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삶이 계속 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처럼 살아보고도 싶은 충동이 일어날 지경입니다(15). 그러한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큰 고통일 뿐입니다(16). 그러나 결국,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삶을 주셨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 분의 어떠하심에 대하여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희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눅8:17).
아직 이해할 순 없지만 순종할 순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불분명한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때까지 내 마음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막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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