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 기가 막힐 웅덩이 속에서도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시40:1-2).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윗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시인의 시를 통해 기가 막힐 웅덩이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차라리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죽음의 상태가 더 나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절망상태에 있으며, 스스로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먼저 내적으로 자신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 스올은 곧 지옥으로서 유황불 가운데 던져진 것과 같은 끝없는 고통으로 인해 삶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린 상태입니다. 또한 외적으로는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으며,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자와 같고,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다고 탄식합니다(4-5).
이는 그가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자'로 취급받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 받고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힘없는 용사"란 조롱받고 버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라는 것은 공동체에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이라고 밝히고 있으며(6), 그러한 상황이 어릴 적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5). 그가 겪고 있는 것이 당시의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질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참혹한 상태의 지속적인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인은 이미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소생의 가능성을 잃어버렸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이며, 죽은 채 방치된 자 같았으며, 그의 침상은 무덤과 같이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얼마나 고통과 절망의 깊이가 크던지 그의 시는 모두 탄식으로 가득 차 있을 뿐, 감사와 기쁨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으며, 끊어지지 않을 절망과 고통 속에서 홀로 신음하며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웅덩이"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처럼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진 시인을 향해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느냐?" 혹은 "왜 고난을 통해 더욱더 강건하게 하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믿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이 고통과 절망 속에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그 누구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은 절망으로만 이해가 되고, 고통은 고통으로만 이해가 되며, 죽음은 죽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것을 대신할만한 다른 것은 없습니다. 고통 없이 고통을 이해하려 하거나 조언을 하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함을 아파하는 것이 위로를 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인은 절망적이지만 내일은 희망적입니다. 그것은 첫째, 그가 죽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라는 그의 표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 그의 생명이 스올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도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기억하게 하셔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시119:144).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갈6:9). 사도바울이 선포한 것과 같이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건지실 것입니다. 시인은 비록 자신의 삶이 죽은 것과 같았고, 또한 죽은 자와 같이 모든 사람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으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시인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과 그 고통에서 구원해 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으며(7),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16). 즉, 시인에게 닥친 고통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주의 진노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서 온다고 증거하였습니다(롬1:18). 그러므로 주의 진노는 시인의 경건치 않음과 그의 불의로 인한 것, 즉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또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고난을 당했던 그가 무슨 죄악이 그리 크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15). 그러나 시인의 고백 속에 담겨 있는 죄란 모든 인생이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죄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처한 시인의 상황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진노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회복된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시인의 현재는 절망이지만 내일은 희망적인 이유는 그가 구원의 하나님을 매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 예수님께서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7).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절망 중에도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1). 즉, 나의 하나님, 나를 택하시고 백성 삼으신 그 하나님께 구원의 약속에 의지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혹 오늘 기가 막힐 구덩이와 같은 절망적인 고통 속에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면 응답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삶에서만 역사하시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돌아보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의 부르짖음은 뭔가 깊은 통찰이나 분별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9). 즉,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인이 매일 부르짖는 것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일어나는 반사적인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는 공짜가 없습니다. 채우시는 것도 말씀을 행하는 자에게 채우시며, 자원하여 드리는 자에게는 은혜로 더 많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하심도 우리는 공짜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대가가 되었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하여 주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남은 삶을 서원합니다. 그는 주를 찬송하겠으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선포할 것이며 흑암 중에 주의 기적과 주의 공의를 알리겠다고 서원합니다(10-12). 즉, 내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시인의 간구는 마치 목숨을 걸고 울며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이대로 죽는다면 찬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시인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에 명중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버리시며 그 얼굴을 숨기신다하여도, 주의 진노로 고통이 물 같이 자신을 에우고 둘러싸며 모든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신다 하여도 결코 그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13-18). 시인의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고통이 절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음으로 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며. 가장 우선한 구원의 근거입니다. 생사화복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과 어려움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머리털 하나도 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알기에 어릴 때부터 고통 중에서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매일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매일, 주야로, 아침마다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9, 1, 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렘33:2-3).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기도하시는 자를 통해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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