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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19:65-80 ■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5.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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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49, 65). 주의 종이라고 반복적으로 고백한 것은 주되신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종하며 스스로 그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쾌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의 종이라고 고백함으로 말씀의 지배를 받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시인은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고백하며, 말씀에서 지혜와 명철을 얻기를 원합니다(66). 명철은 사물이나 상황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적이고 영적인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지식이나 선천적인 지혜를 말한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입니다. 사물을 직접 만져보고, 상황을 직접 겪어보며 얻은 명철을 의미합니다.

시편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시편구절이 있습니다(34:8).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쳐 달라는 시인의 간구는 말씀을 경험하므로 얻어지는 지혜와 지식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단순한 성경지식이 아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67). 고난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하고 주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고난을 주셔서 말씀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주의 종을 선대하신 것이며 선하신 뜻을 두시고 성실히 인도하신 까닭이라 합니다(65).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에야 때에 따라 채워주시는 부요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고, 지극히 낮은 자가 되어서야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사방이 모두 막혔을 때에야 비로소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난당한 후에는 주의 계명들에 귀를 기울였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여 믿었습니다(66).

이제 시인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좋은 명철과 지식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는 자신이 말씀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이제야 말씀이 이전에 자신이 가치를 두고 살던 것보다 가치 있고 자신의 삶을 살리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과 같이 고난이라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중에 붙들어야 할 것은 재물도 인맥도 아닙니다. 오직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만을 붙들고 견디다보면 결국에는 말씀대로 살지 못해 실패했던 지난날의 내 삶과 마주하게 되고, 말씀만이 내 인생을 견고히 세우는 능력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따라 정직히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혹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시인은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라고 결단합니다(69). "교만한 자들"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거나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과 권력이며, 그들은 재물과 권력으로 기름지고 배불러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구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핍박과 죽음을 향한 음해 속에서도 주의 법도를 지키며 오히려 즐거워합니다(70). 세상 것에 끝없이 탐욕스러운 마음, 그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가 된 채 멸망의 죽음을 향해 가는 교만한 자들의 인생과,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견디며 즐거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두 대의 카메라가 양쪽을 각각 비추어 동시에 한 화면에 담고 있는 듯합니다.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자기의 탐욕"을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71). 그리고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72). 시인은 고난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붙잡게 하신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생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을 즐거워하지만, 지혜롭고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즐거워합니다. 지금의 고난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지명 받은 자를 위한 광야신학교에서의 믿음훈련입니다.

주의 손으로 창조하셨지만, 창조 받은 피조물은 오히려 창조주를 부인하고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시인은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73).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음을 인정하고, 그 분이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알기를 소망하며,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면, 그 길 위에서 교만한 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삶에서 창조의 회복, 즉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제 그는 확신 가운데 거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련과 고난은 종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함 때문이며,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확신합니다(75). 이제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위로를 받고, 주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교만한 자들의 죽음 같은 핍박에서 구원받기를 소망합니다(76-77). 고난을 주시면서 까지 뜻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붙잡아 생명의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믿음으로 서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깊고 높으신 뜻을 두시고 합당하게 세워 쓰시려고 고난을 주셔서 연단시키신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의 거짓을 엎드러뜨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한 자신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들을 확인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78-79). 고난이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곧 실패와 절망의 늪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말씀을 붙잡을 때에 오히려 고난은 가마 속의 그릇과 같이 명품으로서의 영예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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