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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5:1-5 ■ 삶을 통해 구원의 증거가 드러나야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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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통해 구원의 증거가 드러나야

 

성도는 삶을 통해 구원의 증거를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지 예배당을 왕래하며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이 예배되게 함으로서 세상 가운에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성이 있어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백성으로서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며, 그 분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이며 특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아니면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없으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 이러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롬14:8). 이는 곧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말한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때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은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이십 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그 여호와의 궤를 메어 나오는데, 기돈의 타작마당에서(삼하6:6에서는 ‘나곤의 타작마당’으로 기록됨) 소들이 날뛰어 웃사가 궤를 붙들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대상13:9). 두려움에 빠졌던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인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석 달 후에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며 다윗은 그의 아내 미갈이 조롱할 정도로 왕의 체면도 잊은 채 즐거워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더 큰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건축해서 언약궤를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수록 성전건축에 대한 그의 소망은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는 탄식과도 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언약궤를 모시고 예배하고자 하는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에 합당한 성전이 되기를 소망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간절한 소망을 따라 사는 것이 곧 주의 장막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주의 성산에 살기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서 계시록에서는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계21:2). 이는 마지막에 완성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이 땅위에서 성도의 삶은 장차 완성될 교회의 아름다움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잃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은 완전합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완전하며, 그 구속 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번복되지 않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삶이 거룩하고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약1:5). 이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의 믿음이 삶을 통해 증거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거할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2-5). 


첫째, 주의 장막과 성산에 살기를 소망하는 성도는 정직히 행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정직함이란 도덕적인 기준으로 “거짓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정직함이란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진리의 구별은 오직 의로우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정직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하며 정직한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창6:9). 


둘째,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안에서만이 옮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입술로만 진실하다 하지 말고, 진실 된 삶을 통해 마음으로 그 진실함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약점이나 허물을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5:4). 다섯째,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은 성경적인 의미로 친구이며 동료입니다. 여섯째, 이웃을 비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방한다’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로 상대를 깎아 내리거나 헐뜯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곧 서로 비교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즉, 상대편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 상대편보다 도덕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망령된 사람을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대해야 합니다. “눈은 망령된 사람을 멸시하며”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 사람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덟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 자발적인 희생제사를 드린 것으로서 “이미 드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번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며 경솔히 대하는 것입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자신의 집 앞에 나와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삿11:31). 경솔한 서원이었지만, 자신을 반기며 마중 나온 사람이 자신의 무남독녀인 딸이었음에도 결국 번제로 드리겠다는 약속을 변경하지 않고 지켰습니다.


아홉째, 이자를 목적으로 돈을 꾸어주지 않아야 합니다. 이자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고리대금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못 갚을 경우 채무자의 자녀를 노예로 삼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뇌물을 받고 무죄한 사람을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청부폭력은 악인 중의 악인의 일이지만 청탁 또한 그로인해 억울한 사람을 만드는 일이므로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삶의 권면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살기를 소망하는 자는 의의 말씀을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5).

 

<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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