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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4:1-7 ■ 치우친 길로 가지 말아야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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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친 길로 가지 말아야

시편 14편은 다윗의 시로, 표제어는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인 시편은 모두 53편으로 찬양대의 지휘자와 같은 사람의 인도에 따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탄식합니다(1). ‘어리석은 자’를 히브리어로 ‘나발’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행하는 어리석음과 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사리분별을 잘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질이 악하여 진리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완고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데서 삶이 시작됩니다. 생각의 출발부터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한 그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등장합니다(삼상25:2-3). 그는 마온에 거주하며 양 삼천 마리와 염소 천 마리를 소유한 부자로 그의 기업은 갈멜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바란광야에 있을 때, 자신과 함께 한 자 육백 명과 함께 양을 치는 사람들의 기업을 지켜주었습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자신과 함께 한 수백 명의 사람들의 식량은 조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양털을 깎을 때가 되자 양을 지켜준 대가로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발에게도 소년들을 보내어 먹을 것을 주기를 요청했지만, 그는 오히려 다윗이 보낸 소년들에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라고 모욕적인 말을 하며 빈손으로 보냅니다(삼상25:10-11). 빈손으로 돌아온 소년들의 말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여 육백 명중 사백 명을 칼로 무장시킨 후 나발을 찾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음식을 준비하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다윗에게 주고 자신의 남편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삼상25:18-35).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 나발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나발은 수천 마리의 양과 염소를 기르는 큰 부자였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양과 염소를 기르기 위해서는 많은 하인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그에게 하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발을 주인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나발을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25:3). 하나님을 두려하지 않았고, 자신의 재물만을 믿고 거만하고 완고했으며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나발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죄에 대해서도 매우 대담하며 거리낌이 없습니다. 부패하고 불법을 일삼으면서도 뻔뻔하고 행함에 있어서 가증스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모든 악이 출발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부패하고 가증한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모두 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부패하다는 것은 썩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지도 자신이 얼마나 썩고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치우친 삶"입니다(3).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길이며,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한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리석은 자가 치우친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길이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깨달음과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 속으로 겸손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지음 받았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도 혹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은 곧 사람의 아들들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들 중에서도 혹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를 살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발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 행하심에 있어서 신중하심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이 없다는 하는 자들의 악함에 대해 고발합니다. 다윗은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4).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약한 자들을 짓밟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나눌 줄 압니다. 그것은 모든 공급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패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의 길입니다. 다윗은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라고 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5). 모든 것을 자기의 마음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들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인해 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다닙니다. 다윗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 수 없으나 그 두려움의 실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또한 다윗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하나님과 함께 한 자의 삶을 보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울의 삶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삼상18:12).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은 악을 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계획을 짓밟고 좌절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6). 가난한 사람이란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살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4).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며 소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인생의 반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된 곳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하나님의 돌이키심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일어서려는 힘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백성들을 돌이켜 한 민족, 한 나라로 세우시는 하나님(7), 그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삶의 반전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

www.youtube.com/@user-uj6ln1ip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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