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편 묵상(완료)

시편 13:1-6 ■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3. 11. 27.
728x90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통과 고난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어렵습니다. 그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대적들의 세력은 갈수록 거세지고 자신의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가는 것을 탄식합니다(1-2). 시인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1) 그의 부르짖음에는 응답도 없으시고 말씀도 없으신 채 오랫동안 자신을 버려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의 울부짖음은 불신이 아닙니다. 깊고 깊은 상처와 고통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라고 반문하듯 호소합니다. 잊는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특히, 각별한 사람일수록 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애써 잊으려고 할 뿐 죽어야 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을 잊은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은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고통 속에서 상황의 진전도 없이 신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느 때까지 주님의 얼굴을 숨기시겠나이까”라는 그의 말은 잊으셨는지를 묻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고통에 대한 진전이 없어도 좋으니 나를 잊지 않았다는 소식만이라도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은혜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맡게 될 아론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민6:25-26). 그리고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반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는 말씀입니다(신31:18).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거두시는 것을 “내 얼굴을 숨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의 부르짖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죄가 있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호소합니다(2). ‘나의 영혼’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번민은 ‘괴로움과 근심’을 의미합니다. 괴로움과 근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계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사람에게 괴로움과 근심은 많아집니다. 즉, 다윗은 이러한 고통 중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들과 지켜야 할 사람들과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원수들은 자신을 공격하며 자랑합니다. 마치 사냥꾼이 더 이상이 도망할 곳이 없는 짐승 앞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원수들은 “어디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 가봐라”하고 비웃습니다. 다윗이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했던 다윗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하는 대적들의 조롱과 멸시였습니다(4). 육체적으로도 다윗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그의 표현은 죽고 싶을 만큼 깊고 큰 고통을 짐작케 합니다(3). 누구나 계속되는 슬픔과 괴로움의 시간은 있습니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 될 것 같더니 왜 이 모양이야?”라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더욱 참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3). 다윗은 지금 이처럼 참담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향해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모든 상황이 역전되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시며 지키시고 계심에도 자신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에도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어서 그 행하심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비춰달라고 했던 것과,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시고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했던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웠습니다. ‘사망의 잠’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고통의 무게가 돌처럼 자신의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면 믿음이 흔들리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적인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다윗은 원수들이 이겼다고 기뻐할까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대적들에게 패배를 당하고, 자신의 삶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대적들을 물리치고 다시 일어서려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며,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신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4).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대적들과의 전쟁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주셔서 대적들로 인한 근심과 고통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1-2).

육체적인 고난과 영적인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변함없이 신실합니다. 다윗이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으며 주의 구원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5). 다윗의 현실은 아직도 대적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음을 믿음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5). 다윗의 그러한 믿음이야 말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신앙”입니다(롬4:18).

다윗의 시는 탄식으로 시작해 찬송으로 끝이 납니다(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는 그의 찬송은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노래입니다(6).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탄식과 원망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건져내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과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

www.youtube.com/@user-uj6ln1ip6s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