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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22:1-9 ■ 감격과 감동이 있는 예배를 회복하라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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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감격과 감동이 있는 예배를 회복하라

성도에게 예배는 큰 기쁨이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전해질 말씀에 기대를 갖고, 또 한편으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감격과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 성전에 오르고 있습니다(4). 하지만 시인이 성전에 올라가는 길은 습관에 따른 무감각하고 감동 없는 종교적 생활이 아닙니다.

오늘 수많은 교회에서 주일이면 드려지는 예배는 내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예배를 선택할 수 있으면서도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감동과 결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선택하고 드릴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다른 곳에서는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숨어서 예배드리거나 기독교인인 것을 숨기고 생활해야 할 만큼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어느 곳에서나 언제든지 예배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감동과 감격을 잃고 습관에 따라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올라가는 시인의 모습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 성전에 올라가지만 올라가는 길부터 기대와 감격과 감동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갈급한 심령으로 주의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말씀에 대한 감격보다는 설교자를 통해 감동과 감격을 얻기를 원합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는 같은 예배자의 모습인 것 같으나 시인과 우리의 모습은 대조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의 예배이지만, 우리는 설교자를 통해 감동과 감격을 얻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적인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친구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노래합니다(1). 이는 단지 성전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삼대 절기마다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23:17). 오늘 우리가 예배자로서 나아가는 마음에 시인과 같은 기쁨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로서 전심을 다하려고 노력할 때에 성령께서 감동과 감격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라고 노래합니다(2). 그는 절기 때 뿐만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하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항상 감동이며 감격입니다. 또한, 시인의 고백은 모든 백성들을 향해 그러한 성전 예배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온라인예배를 통해 스스로 주일성수를 했다는 위안과 만족을 얻으려는 현대인들은 경험할 수 없는 예배의 감격과 감동을 시인은 경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예배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규례에 따라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도 버리지 못하는 고질병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7:6).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율법조문을 지키는 것에만 매여 있는 종교적 생활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율법조문만을 지키며 스스로 거룩하다 여겼던 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23, 11:42).

종교적 행위인 껍데기만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묵은 감정과 생각을 내려놓으려는 노력이야 말로 성령의 충만한 예배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잘 쌓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듯(3),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 또한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저 모여 앉아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교회들은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생활환경도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더욱더 형식적이고 종교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형은 훌륭하지만 내용은 부실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로받고 복을 얻기 위한 내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4: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종에서 자유인으로, 사람의 통치를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리로, 억압과 핍박의 자리에서 은혜와 평강의 자리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따라 성전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23:14-17).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며 예배하는 생활을 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4). 이처럼 성전예배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다윗의 집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5). 이방나라의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정통치를 이루는 대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왕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며, 그곳은 곧 만백성을 공의로 다스리도록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에서만이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6). 사방을 둘러싼 성벽이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만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7).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보며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했지만, 유다의 고관들과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가진 것들이 환란 때에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환란 때에 나의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선포했습니다(11:18).

형통과 평안은 세상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명령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적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 삶을 쇠기둥과 놋성벽이 세워진 견고한 성읍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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