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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9:1-20 ■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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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신학자들은 시편 9편과 10편을 한 편의 시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9편에는 표제어가 있고 10편에는 표제어가 없다는 점과 시편 9편에서 10편까지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배열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알파벳은 ‘알렙’부터 ‘타우’까지 총 22개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는 문장의 시작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하는 알파벳시가 8편이 있는데, 시편 9-10편과 22, 34, 37, 111, 112, 119, 145편입니다. 시편을 읽는 우리에게 그러한 근거는 중요하지 않지만 시편 9편과 10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내용을 묵상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9편의 표제어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이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9편의 표제어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벤’은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원래 ‘벤-야민’으로 기록되었는데, 야민은 ‘오른쪽 혹은 남쪽’이라는 뜻으로 벤-야민은 ‘남쪽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인 ‘벤허’의 의미가 ‘그분의 아들’ 또는 ‘훌의 아들’이라는 뜻을 의미하듯, ‘뭇랍-벤’에서 벤은 ‘아들’을 뜻하고 뭇랍은 ‘죽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보기에는 시편 9편과 10편의 내용은 기개가 넘칩니다.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의 아들이나 아들이라 여길만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즉 원수들 죽음을 놓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며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라는 시인의 노래는 그러한 정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3).

다윗은 원수들을 멸하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기뻐하며 찬송하겠다고 합니다(1-2).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다윗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할 것”과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할 것을 결단합니다. 찬양과 경배를 굳이 구분할 필요 없지만 꼭 해야 한다면 찬양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노래”이며,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찬송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3절 이후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을 멸하시고(3),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으며(4),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합니다(8).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4). 전쟁에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도망가다가 넘어지고 멸절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한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내 의로운 삶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시인이 그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완전하십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이름으로 지우셨으며, 무너뜨린 성읍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역사로 이스라엘을 위해 앞장서 가셨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위대한 문명을 이루며 과학적인 농사법을 보유하였으며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정도의 경제력과 과학적 지식, 그리고 수많은 군사들을 보유한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애굽이 가진 모든 것을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은 오늘도 시인에게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공의와 정의의 심판을 통해 영원한 형벌에 이를 것임을 의미합니다(7-8). 이처럼 시인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영원히 그 세력을 떨치며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3). 그러나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주를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0). 하나님께서는 압제를 당하는 자와 환난을 당하는 자의 요새가 되어주시며(9),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8).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27:10). “내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극단적인 고난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피난처를 삼는 자들은 자기 백성을 죽음의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경험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할 것입니다(11). 악인의 길을 부러워하며 그들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흘린 피에 대해 잊지 않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12).

‘사망의 문’은 죽음직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인은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라고 부르짖습니다(13).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은혜를 베풀어 고통을 돌아보시고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고, 원수들로 인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상황 속에서 응답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찬송하며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4). 악인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질 것이며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릴 것”입니다(15). 그러므로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과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자기의 선택이 올무가 되어 고통 받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비록 가난하고 궁핍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따라 지키는 자는 영원히 실망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인생의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고, 악인들은 심판 앞에 큰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입니다(19). 그들의 권세와 흥함이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거짓된 초라한 인생일 뿐, 하나님의 때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초라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20). 우리는 모두 삶을 통해 시편을 써나가는 기자입니다. 시편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노래”한 것이듯, 우리 삶은 매일매일 내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록하는 노트입니다. 우리 기억 속에,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기억 속에 “나의 시편”이 은혜의 증거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강진 강남교회 새벽이슬묵상 》

www.youtube.com/@user-uj6ln1ip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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