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라
시인은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흩어져 속박 당하던 백성들을 죄에서 속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선포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 분의 이름만 높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 것입니다(사12:4).
이스라엘의 멸망은 조상 때부터 답습되어 온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고 모든 백성은 포로가 되었거나 전쟁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잔혹하게 대했던 바벨론을 바사를 들어 멸망시키시고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귀환한 백성은 이전과 다름없이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삼는 등 다시 죄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학사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여호와의 성전 앞마당에 모으고 금식과 기도로 성결운동을 전개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회개와 믿음의 결단이 있었지만, 이들이 끊어내지 못한 반복적인 죄악은 결코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아스라엘의 반복된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자와 긍휼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렘33:10).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인자를 베푸신 것은 그들의 선한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약속에 의해 구원하시고 흩어졌던 백성들을 모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인자하심입니다(2-3).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여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살도록 모으신 것은 인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 바벨론에서의 귀환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과 긍휼을 베푸신 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과 번성의 약속에 따라 그의 가족을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셨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로 인도하셨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강대한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책임지시는 것이었음을 증거합니다. 거할 성읍이 없던 광야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주리고 목이 말라 부르짖던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떼로 먹이시며, 결국에는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4-7). 오늘도 예측할 수 없는 길에서 고난당한 백성이 부르짖을 때마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9).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사29:8).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나 죄악을 행하던 이스라엘을 '아리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인 또한.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0-11).
우리는 인생의 근본적인 고통이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방법의 오류나 경험부족이나 예기치 않는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죄악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히 하나님을 찾도록 고통을 전령으로 사용하실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12).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인생이 악함으로 인해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채찍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채찍으로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애3:33).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백성을 인도하여 내셔서 억압받고 핍박받던 인생에게 감사와 찬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14-15). 스스로 강함을 자랑하고 무너지지 않을 놋성벽을 쌓는다고 하여도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으셔서 반드시 자기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16).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들은 결국 고통 받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지만(17-18),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백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19).
시인은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20).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한 질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지만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이 생명임을 깨닫고 붙드는 자마다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구원을 주신 것은 인생들에게 유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호와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즉, 인자와 긍휼을 베푸셔서 인생들이 그 행하신 기적으로 인해 찬송하게 하고 감사제와 노래를 드림으로 모든 열방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전해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21-22).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우리가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의 이름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며, 예배자의 삶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죄악 중에 고통 받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체의 음식은 즐겨하면서도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함으로서 스스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18). 음식을 먹지 않아 사망의 문에 이르게 된 자녀에게 쓴 약을 먹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죽게 된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자 말씀을 보내셔서 구원해주시고(왕하20:4), 말씀을 보내셔서 죄악 된 이스라엘을 치유하시고자 하신 것처럼(사9:8), 오늘도 우리를 위해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을 붙잡는 자들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억지로 짐을 지우듯 한 강요가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며, 말씀을 보내신 하나님께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내신 말씀을 무거운 짐으로 느낀다면 내 삶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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