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볼펜이 일상화된 요즘과 달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펜촉에 잉크를 찍어서 글을 쓰거나 혹은 좀 사정이 괜찮은 사람들은 만년필을 사용했습니다. 잉크병이 가방 속에서 깨지거나 혹은 책상위에서 쏟아질 때면 책이나 옷을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볼펜이 나온 이후로 그러한 불편함은 사라졌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옷을 버릴 염려도 없었습니다.
펜촉에 익숙했던 선생님들은 볼펜을 쓰면 글씨체 버린다고 펜촉을 이용해 글씨를 쓸 것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볼펜의 편리함과 자유로운 감성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볼펜이 바로 모나미 볼펜입니다. ‘모나미(Mon Ami)’는 ‘내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 글자의 의미대로 모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구와 같이 편하고 익숙한 필기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할렐루야”로 시를 시작합니다. 그 의미는 “‘Yah’를 찬양하라”입니다. Yah는 곧 여호와(야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히브리어 말입니다. 또한, “할렐루”는 “찬양합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인은 시를 시작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면서(1),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양함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나미 볼펜과 같이 할렐루야는 우리 삶을 말하는 대명사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께 예배하며 성결하고 거룩한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은 자가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고백은 찬양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찬양하자”는 선포를 넘어 언제까지 찬양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찬양의 시기에 대해서 시인은 “해 돋는 곳에서 해 지는 데까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해 돋는 곳에서 해 지는 데까지”라는 것은 시기와 장소를 동시에 언급한 것입니다. 즉, 평생에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찬양이 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의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2-3). 하나님의 백성에게 찬양은 특권이며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 받은 인생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쓸 것을 채우시고 선한 뜻을 두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믿음을 고백하고 의의 길을 소망하며 약속을 붙잡은 자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감사의 절정이며, 최상의 예배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분은 없으며, 내 인생에서 오직 그 분만이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찬양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으며, 그저 듣거나 즐기는 세상의 음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며 그분을 아는 경험적인 지식에서 나온 자발적인 탄성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은밀한 교제이며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술만으로 드리는 노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삶을 통해 믿음의 고백이 되는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니며, 예배를 돕기 위한 사전행위도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와 앞으로 받을 은혜에 대한 최상의 감사이며 성령의 역사 가운데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왜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인가?”라는 사람들의 질문 앞에 시인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기 때문입니다(4). 하늘과 땅에서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 분의 영광보다 찬란한 것도 없습니다. 모든 나라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으며, 그가 행하실 역사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로 친히 강림하신 분이십니다(5-6).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일방적인 통치가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과 근심을 함께 나누시며 그들의 삶을 통해 높으신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름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분의 통치아래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 분의 주권적인 사역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넘어설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스스로 낮추셔서 세상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와 함께 하신 주님께서는 없는 자를 통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자와 수치와 조롱가운데 있는 자들을 들어서 스스로 강하고 존귀하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7). 자녀가 없어 소망이 없는 여자의 태를 여셔서 자녀들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어머니가 되게 하셔서 모든 인생들을 품게 하실 것입니다(8-9).
철저히 파괴된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게 하시고 그 영화를 회복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거름더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선하신 뜻으로 강건하게 세워가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를 조성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은 그 하나님의 손에 아로새겨져 잊혀지지 않고 오늘도 조성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찬양을 드리는 삶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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