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누군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땅 이후의 삶은 중요하고 이 땅에서의 삶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 핵심 진리를 빼놓고는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 진리가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단순한 위로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천국에 대한 소망이 이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고통에 단순한 위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이 땅위에서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승리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천국의 소망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서의 대적들의 공격과 그로인한 고통까지도 감당할 능력을 이미 주셨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단지 천국에 가야만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위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시며, 세상을 이길 권세를 이미 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눅10:19). 이미 그러한 권세를 받았음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무기를 전혀 쓰지 못하는 병사와 같습니다.
시인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나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습니다. 물 없는 광야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향해 가는 여행자처럼,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만이 ‘나의 주’가 되심을 확신하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몸과 마음, 신경과 촉각 어느 한 곳도 예외 없이 온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찾지 못한 나그네는 종종 신기루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광야에서 갈망하고 찾는 하나님은 신기루가 아니라 현존하신 분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성소에서 예배 중에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맛보았었고, 지금 그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막의 신기루가 아닙니다. 사막과 같이 삶이 고단하고 힘든 이들의 눈에 환상으로 보이는 허망한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하신 분이시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택하신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며, 오늘도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나의 음성을 들으시고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삶의 새 생명의 역사를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2).
이처럼 시인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앙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조차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에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그 변치 않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실로 형용하기 어려운 자신의 권능과 영광으로 자기 백성의 생명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계약과는 다른 것입니다. 계약은 계약의 두 당사자의 상호 합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약은 내가 무엇을 하면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의 언약으로 조건이 없습니다. 마치 결혼 서약과도 같습니다. 요즘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혼전계약서를 쓰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조건 없는 사랑을 근거하는 결혼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며, 조건 없는 사랑을 상호간의 이익을 위한 조건부 계약으로 만드는 악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결혼 서약은 “당신이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라고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건 없는 사랑을 약속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도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변함없는 사랑을 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자녀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닌 계약관계가 설정된 인생들, 그 인생들 속에서 이익이 없으면 떠나고 배신하고 돌아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관계의 인식 속에서 때때로 친구와 가족마저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사막과 같은 황량함에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하나님은 내가 어느 곳에서 있든지 “그곳에서” 나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3-4).
고난이 하나님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을 꺾지 못합니다. 힘겹고 어려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좋은 음식으로 배부르듯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만족하며 기쁨의 찬송을 올립니다. 즉 상황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달라지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상황을 바꾸시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십니다. 고난이 오히려 풍성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교제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5).
이처럼 시인이 모진 역경 속에서도 그곳에서 찬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줄곧 시인에게 도움이 되어 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묵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성소에 들어가 주의 날개 그늘아래서 보호받으며 찬양을 부르리라 다짐하였고, 주의 오른 손의 권능을 확신하며 주를 가까이 따르겠다고 결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은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취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고난 중에도 ‘나의 하나님’ 되시는 그 분을 만나를 소망해야 합니다(6-8). 이와 같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고 마땅히 바쳐야 할 신뢰를 보낼 때,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의 입을 막으시고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시인은 확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만 나열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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