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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84:1-12 ■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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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시편 84편은 성전 예찬가로는 최고의 시로서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갈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이 살던 때에는 광야에서의 성막, 혹은 장막의 시대는 가고 이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있었던 때였기에(왕상6:1-8), 그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장막이라고 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인 장막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삼하6:17). 그러나 어느 곳을 말하고 있느냐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 그가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으로 언급하지 않고 언약궤가 있는 장막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약궤가 보관돼있던 장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인은 레위 족속에 속한 고핫의 증손인 고라의 자손으로서 광야에 있을 때부터 회막의 지성물을 대대로 담당해 왔습니다(4:4).

그러므로 그가 '주의 장막'이라고 언급한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동행하며 경험하게 된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볼 수 없어 깊은 마음의 병이 든 것과 같이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의 깊이였습니다(2). 마음과 육체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일상이 오직 사모하는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한 마리의 참새나 제비가 되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권세보다도 주님의 장막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새끼를 돌보는 참새나 제비와 같이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3). 물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장막이 새가 둥지를 틀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곳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시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지금의 모든 상황을 벗어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주간 세상 속에서 즐거움과 쾌락만을 쫓아 살다가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 찾아가 예배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의 삶의 중심입니다.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되고, '둥지'가 되어야 할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회복될 때에 내 일상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참 기쁨과 복을 누려 본 사람의 깊은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성전을 향한 사모함은 그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멀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5). , 오랫동안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막막해져 있는 그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거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 수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과의 항상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그곳에 둥지를 튼 새라도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힘겨운 여정입니다(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은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며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107:9).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확신하고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와 같이 고통의 연속인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 많은 샘을 두시고 이른 비를 주셔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도우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손해가 나는 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주일에도 자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희생해야 하고, 많은 재물과 지식도 포기해야 하는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가는 길은 절망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지치고 힘든 영혼이 소생케 되며 힘을 얻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7).

이사야 선지자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35:8-10).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길이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풍성한 샘과 모든 만물을 소생케 하는 이른 비의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사모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인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8-9).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선지자, 혹은 제사장을 세울 때에 기름 부어 세웠습니다. 그가 성전 안에서 봉사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도 아니고 제사장이나 선지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 중에서도 아론 자손만을 제사장으로 삼게 하셨고, 나머지 레위인들은 성전에 제사장들을 돕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고백대로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맡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자신을 향한 고백이 아니라, 왕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인도해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또한,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라는 고백에서, 그가 대적의 포로가 되어 있거나 혹은 그와 다름없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10).

그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던 시간만이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은 시인을 고라 자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모세의 사촌인 고라의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서 광야에서 르우벤 자손인 다단과 아비람과 온을 미혹하여 당을 짓고 족장 이백오십 명을 포섭하여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하다 함께 하던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었습니다(16:1-35). 하지만 그의 세 아들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후대에 성전 문지기가 되었으며(대상9:17-19, 26:1-19), 일부는 찬송하는 자로(대하20:19), 빵을 굽는 성전 요리사로(대상9:31),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였습니다.

레위 족속에 속한 고핫 자손이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에서 지성물을 관리하며 봉사해 왔다는 사실은 구약을 통해 이미 언급되었습니다(4:1-20). 그는 악인들의 편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려도 성전 문지기로서 하루를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며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 거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의 인생에 복을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11-12). 시인과 같이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 영광 중에 거하며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복이며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한량없는 기쁨과 만족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해 날마다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에 부어주시는 은혜와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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