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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완료)

시편 118:1-13 ■ 부르짖었더니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by 해원의 아침묵상 202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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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3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8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0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1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2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3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부르짖었더니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인생은 넓은 곳을 추구합니다. 좀 더 크고 넓은 승용차와 넓은 집과 넓은 땅, 그것은 인생들이 평생 동안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입니다. '크고 넓은 것들'은 인생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자기의 자존감과 영광을 높이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좁고 작은 것에서는 감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 단지 시인이 의미없이 던지는 종교적인 촉구가 아닙니다. 환란과 고통 중에서 부르짖던 시인에게 응답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외침입니다(5).

시인은 고통 중에 부르짖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증거합니다. 시인에게 넓은 곳이란,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인 넓음이 결코 아닙니다. 시인은 감사넓은 곳이라는 의미를 한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에게 있어서 넓은 곳이란 "고통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며, 더욱더 "큰 은혜 가운데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삶이 무너지고 대적들에게 짓밟히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모든 백성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찬송하기를 촉구한 것은 "내 편 되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 고통스러운 현실은 하나님을 잊고 신음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는 확신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회복시키실 권능의 손을 붙잡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없는 사랑"에 그 기초를 둡니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패역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버리시지 않으시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이끄셔서 영광스러운 승리와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2).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하며 내일도 여전히 아름답게 빚어주실 사랑을 기대하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는 시인의 고백은 이전에 그의 삶이 협소한 곳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5). ,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위험한 상황, 대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숨조차 자유롭게 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절망하고 포기하며 불의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타협하고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기 보다는 끝까지 인내하며 공의를 행하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은 시인에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숨조차 쉴 수 없는 협소한 곳으로 내몰 때에도 그때마다 도울 자를 보내셔서 함께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셨고, 악인들을 멸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온 땅에 가득함을 증명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6-7).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의 시간이 불평과 원망으로 채워져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믿음의 성숙함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선포합니다(8-9). 참된 안전과 평안을 주는 피난처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황은 믿음을 묘연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고 권세자들을 피난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지금 우리를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신입니다. 악한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흔들고 쓰러뜨리려고 합니다.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새 힘을 얻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10). 근본적으로 시인이 "에워쌈을 당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그가 대적들의 세력이나 악의를 끊을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할 때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11). 고난은 내 능력으로 극복해 갈만한 상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벌떼처럼 한꺼번에 달려들어 큰 고통과 상실감을 줍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강당 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 곧 고난입니다.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밤사이에 엘리사가 있던 성읍을 에워싼 것을 그의 사환 게하시가 보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엘리사를 찾을 때에,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였고, 그의 눈으로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왕하6:15-17).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의 눈에는 성읍을 둘러싸고 있는 벌떼 같은 아람의 군사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가 믿음의 눈으로 견고한 진을 펼쳐 주의 종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적의 도구쯤으로 여겨 가볍고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라고 말한 것은, 권능의 손으로 환란이나 대적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믿음이 없는 선포는 사탄이나 악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믿음으로 선포할 때에 벌떼와 같은 악인들도 가시덤불의 불같이 타 없어질 것입니다(12). 세상에서는 믿는 자가 핍박을 당하며, 대적들이 밀쳐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심령을 굳건히 하셔서 어떤 환란이나 고통 속에서도 견고히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대적들로 둘러싸인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지라도 오히려 믿음의 눈을 열어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나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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